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민당의 1차 북벌 (문단 편집) ==== 국민혁명군의 [[장시 성|강서]] -[[푸젠 성|복건]] 공략 ==== >"[[쑨촨팡|이 짐승]]은 자신의 반동사상으로 교활한 술수를 벌인다. 그를 격파하고 제거하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일 뿐이다." >---- >1926년 9월 17일 장제스의 일기. 무창 공격이 진행되던 중인 1926년 8월, 장제스가 쑨촨팡에게 국민혁명군으로 귀순하라고 제의했으나 거절당했다는 것은 전술한 바가 있다. 쑨촨팡은 우페이푸 다음은 자신이 될 것이라 여기고 산동의 [[장쭝창]]과 의형제 결의를 맺어 더 이상 싸우지 않기로 협정을 체결했고 쑨촨팡은 서주에, 장쭝창은 연주에 주둔하며 서로 1개 여단을 초과하지 않으며 오성연합군이 우페이푸를 지원하러 가게 되면 산동을 통과할 것을 허락하기로 했다. 장쭤린 역시 우페이푸가 완전히 몰락하면 쑨촨팡이 오히려 북벌군에 합류할 것을 우려하여 [[왕잔위안]]을 난징으로 보내 쑨촨팡에게 자신과 힘을 합쳐 북벌군을 막자고 제의하자 쑨촨팡은 "서로 끌어 주길 원하며 상황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9월 9일 장쭤린은 우페이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우페이푸 장군이 패하여 우한이 이미 함락되었습니다. 동남의 반쪽이 전부 나와 형께 의지하고 있어 현재의 정세가 아주 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형과는 서로 작은 감정과 틈이 있었지만 우리 빨리 동쪽으로 가서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후 장쭤린은 [[진윈펑]]을 난징에 보내 봉천군과 산동군이 절대로 진포선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고 공산당을 토벌할 때도 경한선만 쓰겠다고 쑨촨팡을 안심시킴으로 쑨촨팡을 반국민당 전선에 잔류시켰다. 쑨촨팡은 8월 31일 3방면군 총사령관 노향정을 강서성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북벌군을 견제하기로 했다. 국민혁명군도 쑨촨팡에 대항하기 위해 2,3,6군을 강서성에 배치했다. 조너선 펜비는 장제스가 무창 공격을 중단하고 강서성을 공격한 것을 바실리 블류헤르에 밀려 위축되었던 군사적 영광에 욕심이 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바실리 블류헤르는 장제스는 자신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공공연하게 발언할 정도였다.] 하지만 레이 황은 공산당원들이 장제스에게 무창 함락의 공을 쥐어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에 군사적 영광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던 강서 전선으로 장제스를 보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8월 29일 장제스는 무창을 떠나 강서 전선으로 이동했다. 9월 6일 국민혁명군은 강서성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했다. 그날 평향이 함락되었고 19일 6군이 강서성의 성도 [[난창]]에 입성했다. 국민혁명군의 입성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은 이를 환영하고 쑨촨팡의 오성연합군의 시설을 파괴하는 등 국민혁명군의 진격을 도왔다. 하지만 소수의 병력으로 지나치게 깊숙히 진군한 것 덕분에 쑨촨팡의 반격을 허용하게 되었다. 구강까지 철수했던 오성연합군은 난창을 탈환하기 위해 대군을 투입했고 난창을 방비하고 있던 1만명의 국민혁명군은 수적열세 때문에 큰 타격을 입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쑨촨팡은 난창을 점령하고 국민혁명군에게 협조한 혐의를 받는 시민들을 닥치는대로 처형했다. 초기의 무리한 공세 때문에 국민혁명군이 입은 피해는 1만명에 달했다. 강서성 공략을 독전하기 위해 난창으로 향하던 장제스는 난창을 도로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난창 서남서 60킬로미터 지점의 고안을 거점으로 삼고 반격을 준비했다. 9월 15일 장제스는 무창을 포위공격하던 1군 2사단을 빼내어 강서 전선에 배치했다. 장제스는 10월 12일, 1군 2사단과 4군을 투입하여 난창을 공격했으나 오성연합군의 화포 공격에 피해가 속출하자 철수했다가 보급선을 차단하는 포위기동작전을 실시했다. 11월 5일 구강이 함락되었고 11월 7일에는 난창이 항복했다. 이로써 오성연합군의 정예부대들이 궤멸하면서 쑨촨팡은 난징으로 도주했다. 이로써 강서성이 국민혁명군의 손에 들어왔고 북벌군은 4만명의 포로를 잡았다. 한편 [[허잉친]]의 동로군도 복건성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복건 독판 주음인은 허잉친에게 패배했고 동로군은 12월 18일 푸저우를 함락시켰다. 주음인은 절강성으로 도주했다. 이로써 호남, 호북을 비롯한 양호지역, 강서, 광동, 광서, 귀주, 복건 지역이 완전히 국민당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국민당은 13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총 7개 성, 1억 7천만 인구를 통치했다. 총 2만 5천명의 병사들이 전사했고 그중 1만 5천명이 강서 전역에서 소모되었으나 24개 군벌이 국민당에 합류하면서 국민당의 병력은 26만으로 늘었다. 하지만 급격한 숫자로 늘어난 군대 때문에 재정적 문제가 심각해졌다. 급료를 받지 못한 군사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고 재정 문제 때문에 [[장제스]]와 [[쑹쯔원]]의 관계가 최악으로 악화되어 관계 단절을 선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군벌들은 군벌군이 다 그렇듯이 기량이 영 좋지 않아 사고를 많이 쳤고 반국민당 세력의 비난거리가 되었다. 중국 평균을 보면 더 막장인 군벌들이 많긴 했지만.] 북벌의 괄목할만한 성과에 국민당을 개무시하던 열강들도 태도가 전향적으로 바꾸었다. 영국은 원래 우페이푸를 지지했지만 국민당의 북벌이 대승으로 끝나자 한커우에 주 베이징 영국 대사를 보내 국민당과 회담을 가졌고 다른 열강들에게 중국에서의 안정적 이권을 위해 기존의 조약을 개정할 의사가 있음을 중국의 신정부에게 보여줘 신정부의 호감을 사야 한다는 의견을 보냈다. 하지만 국민혁명군은 매우 반외세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고 병사들이 선교사와 외국인들을 공격하면서 서구 열강과의 접촉이 엎어졌다. 이것이 국민당 좌파에서 내세운 혁명외교였는데 1927년 1월 3일 한구의 영국 조계지에서 영국 해군과 중국인들이 충돌하자 정무회의가 조계지의 행정을 국민정부에 이양했고, 국민정부는 치안유지를 이유로 조계지를 회수했다. 1월 6일에는 구강의 영국 조계지를 국민정부가 회수했다. 이런 과격한 혁명외교는 조계지 회수라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으나 제국주의 열강을 분노시켜 군사적 개입 가능성을 높임으로 국민당 우파의 불안을 가중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